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노스웨스트 더비 (문단 편집) == 배경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liverpool_manchester_city.png|width=100%]]}}} || || '''[[잉글랜드]] 북서부에 위치한 [[리버풀]]과 [[맨체스터]]의 도시 경관''' || 양 팀의 연고지인 [[리버풀]]과 [[맨체스터]]는 고작 35마일 떨어진 곳에 서로 위치한 잉글랜드 북서부의 도시들로, 자동차로 한 시간이면 다녀 올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있다. 리버풀과 맨체스터에 가면 반드시 방문해야 할 명소들이 몇 군데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리버풀의 알버트 독과 맨체스터의 산업 박물관. 알버트 독은 리버풀이 [[대영제국]]을 먹여 살린 항구 도시로서의 기초를 닦은 곳이며 산업 박물관은 수로 사업을 기반으로 한 맨체스터의 눈부신 성장의 역사를 담아낸 곳이다. 이러한 양 도시의 관광 명소들이 보여주듯이, 리버풀과 맨체스터는 모두 18세기 [[산업 혁명]] 당시에 급속도로 발전한 지역들이다. 본래 18세기까지 맨체스터는 리버풀에 비해 훨씬 더 인구가 많은 도시였고 잉글랜드 북쪽을 대표하는 도시로 여겨지던 지역이었다. 맨체스터는 [[산업 혁명]]의 중심지로 시대를 앞선 기술을 통해 수많은 공산품을 생산하던 대표적인 영국의 공업 도시였다. 그러나 18세기 후반, 리버풀이 잉글랜드 북부 지역에 위치한 면화 공장들과 함께 중요한 항구 도시로서 함께 성장하기 시작했다. 19세기에 걸쳐 영국의 수출 규모가 크게 확장되자 리버풀은 맨체스터의 산업을 일부 대체하면서 점차 발전을 거듭했고,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는 대영제국의 수출 전진기지가 된 리버풀이 아예 영국 제2의 도시로 여겨지는 등 엄청난 호황을 누렸다.[* 리버풀이 런던을 먹여살린다는 이야기가 있었을 정도.] 두 도시는 당시 영국의 산업과 수출의 큰 축을 담당하며 눈부신 성장을 이루어냄과 동시에, 리버풀의 항구에서 내륙으로 원자재를 수송하기 위한 도시 간 [[리버풀-맨체스터 철도]][* 1830년에 건설된 영국 최초의 도시간 철도 노선. 이 노선은 세계 최초로 전 구간에 기관차를 이용한 여객 및 화물 운송을 수행, 근대적인 철도 운송 시스템의 시발점이 되었다.]의 건설로 상호 활발하게 교류하며 협력 관계를 공고히 다지기도 했다. 하지만 19세기 후반, 두 도시 사이의 경쟁 관계가 감정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대영제국 시절 전세계 무역의 절반 이상이 리버풀을 거쳤을만큼, 리버풀은 당시 영국 최대 규모의 무역항이었는데[* 그 유명한 [[타이타닉]]호도 리버풀(리버풀은 모항)에서 출항했다.] 1894년, 맨체스터는 항구의 물류비용이 비싸지자 공산품을 직접 수출하는 방법으로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맨체스터에서 곧바로 아일랜드 해로 연결되는 당시 서양에서 가장 큰 운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엠블럼에 범선은 이 맨체스터 운하를 의미한다.]를 건설하는 계획을 세운다. 이 맨체스터 운하의 등장은 리버풀에게 크나큰 타격으로 다가올 것이 뻔했고, 맨체스터 상인들의 자금 지원을 받은 맨체스터 운하 건설은 리버풀 정치인들의 반대에 부딪히게 되었다. 하지만 결국엔 맨체스터 운하가 건설되면서 리버풀 지역의 노동자들과 맨체스터의 지역의 노동자들 사이엔 갈등이 불타올랐고 이로서 '''양 도시 사이의 적대감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해당 시기인 1894년, 리버풀을 연고로 하는 [[리버풀 FC]]와 맨체스터를 연고로 하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당시 이름은 뉴턴 히스]가 풋볼 리그 승강 [[플레이오프]]에서 처음으로 맞대결을 펼치며 양 지역 노동자들의 분위기는 더 뜨거워졌다. 이는 초창기 잉글랜드 축구 클럽들이 대부분 지역 노동자들에 의해 만들어졌기 때문이었다. 이런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낳은 양 도시 간의 라이벌리는 현대의 노스웨스트 더비까지 이어져 오며 이 더비 매치의 열기를 뒷받침하는 근본적인 배경이 되었다. 또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전 세계가 경제 위기에 시달렸는데, 이는 승전국이었던 영국도 예외가 아니었던 터라 외국인 노동자의 진입장벽이 낮아지면서 항만산업에 전적으로 의존하던 리버풀은 직격탄을 한번 더 맞게되었다. 당시의 현지 부두 노동자들은 해고되기 일쑤였고 리버풀의 도시 경제는 크게 휘청거렸다. 반면 맨체스터의 경우에는 제조업이 도시의 기반이었기 때문에 리버풀과 비교하자면 그래도 타격이 적었다. 이후 [[마거릿 대처]] 당시의 대대적인 산업 구조조정으로 두 도시는 동시에 어려움을 겪었던 시기도 있었으나[* 리버풀 팬들이 대처를 극도로 증오하는건 축구팬들 사이에서 유명하지만, 의외로 맨유도 대처 시대에 고통받은 전력이 있었다. 의외가 아니라 맨채스터도 사실 알고 보면 다 거기서 거기인게 산업혁명때 엄청 성장했다가 전후 탈산업화, 대처리즘으로 크게 망한 북잉글랜드 산업 도시다. 대처, 남부 잉글랜드 상류층 혐오 성향은 리버풀, 맨체스터 뿐만 아니라 셰필드, 리즈, 요크, 더럼, 브래드포드, 뉴캐슬, 잉글랜드 북부 지역은 보편적으로 공유한다고 봐도된다.], 현대로 넘어오면서 맨체스터는 리버풀에 비해 계속해서 비교적 더 나은 경제 사정을 가지게 되었고, 이에 의해 두 도시는 강한 지역 감정을 이어오게 되었다. 더군다나 영국 정부가 1974년에 기존에 [[랭커셔]]주에 속해있던 두 도시들을 [[머지사이드]]주와 [[그레이터 맨체스터]]주로 각각 분리시키면서 양 도시는 행정적인 유대감마저 잃게 되었다. 그러나 재밌는 것은 두 도시 사이의 깊은 불신에서 비롯된 이 라이벌리에 있어서, 두 도시는 수 많은 차이점을 가졌지만 동시에 수 많은 공통점 또한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리버풀]]과 [[맨체스터]]는 [[산업 혁명]] 당시에 함께 성장한 배경을 가지고 있는 잉글랜드 북서부의 대표적인 광역권 도시일 뿐 아니라, 정치[* 두 도시 모두 상당한 좌파 성향을 가지고 있기로 유명하다.], 패션[* 70년대와 80년대 영국의 많은 [[서브 컬쳐]]들이 두 도시를 기점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음악[* 대중 음악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위대한 밴드들의 고향이기도 하다. 대표적인 것이 리버풀의 [[비틀즈]]와 맨체스터의 [[오아시스(밴드)]] --여기는 맨시티다--], 축구 등에서 세계적으로도 굵직한 존재감을 가지고 있는 도시이기도 하다. 즉, 두 도시는 끝나지 않는 라이벌 관계와 더불어 잉글랜드 북서부의 정서적, 문화적 주춧돌이자 원동력으로서 작용해온 공통적인 역사와 의미 또한 가지고 있는 것. 실제로 양 도시 사람들 간에는 몇몇 차이를 제외하면 딱히 서로 다를 것도 없다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도시와 문화가 상호 닮은 점이 많은데, 앙숙 관계이면서도 서로에게 동질감을 느끼는 이러한 특이점이 노스웨스트 더비를 구성하는 양 팀의 역사에서도 잘 느껴지는 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